8월 15일부터 20일까지 프랑스 낭뜨에서 열리는 티벳불교의 법회장을 찾았다. 유명한 달라이 라마가 법을 설하는 시간은 모두 5일간 진행되었다. 삼엄한 경비 속에 사진 촬영은 물론 소지품도 모두 검사를 받아야 입장이 가능하였다.
| |
 |
|
| |
| ▲ 낭뜨의 유명한 체육관에서 열린 달라이 라마 법회장을 찾은 사람들. |
| |
법회장은 커다란 체육관이다. 모두 미리 좌석을 구입하여야 입장이 가능하였다. 미리 책자를 배포하여 책을 중심으로 경전과 질문을 통해 문답식 대담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어와 영어로 진행되었으며, 티벳스님들이 티벳말이나 영어를 불어로 통역하였다.
참가자들은 달라이 라마가 법석에 오르기 전에 착석하여 만트라를 다같이 읊었다. 우리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무척 낯설었다. 우리는 절에 들어서거나 법회장에 가면 시작 전에 삼귀의나 반야심경을 외우는데, 프랑스에서는 짧은 만트라를 다 같이 외우는 것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달라이 라마가 법석에 오르기 전에 다 같이 일어서서 경배를 하였다. 선 채로 삼배를 올리거나 일배를 하는데, 그냥 가만히 서서 지켜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조용히 일어나 조용히 앉아 곧바로 '경전의 몇 페이지를 펴세요'하는 말에 그대로 따라 마치 성경을 읽듯이 그 내용을 따라가며 공부를 시작하였다.
우리의 절문화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의식을 최대한 짧게, 내용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일요일에 가끔 절에 나가보면 법회의식을 하느라 정작 스님의 법문시간은 짧아지고, 그나마 짧은 법문 속에서도 책이나 교재는 없이 그저 스님의 말씀을 잠시 귀동냥하는 정도에 그친다.
프랑스 사람들의 진지함은 어디에서
프랑스 사람들의 이런 진지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들의 학문적 배경이 우리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일단 성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마 나이를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50-60대 성인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사미계를 받은 붉은 승복을 입은 여승들이 참 많았다. 마치 그들의 노후를 티벳불교에서 누리려는 듯 참 많은 분들이 승복을 입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들에게 티벳불교는 또 하나의 동양의 신비로움이다. 그들의 참가 복장을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 티벳 의상과 중국 의상, 아마 한복같은 어쩌면 동양문화에 대한 갈급이 티벳불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이들에게 불법승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티벳불교의 핵심 원리, 그 사상에 대한 궁금증이 그들의 발길을 달라이 라마에게 기울이게 하는 것 같았다.
티벳불교 법회에 참가하기 위해 머물렀던 집의 프랑스 여인에게 질문을 해보았다. 천주교 신자로서 불교를 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불교에 대해 웬만큼 알고 있으니 신앙으로 받아들여 귀의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생각해 보겠다고 한다. 곧바로 티벳불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기는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즉, 철학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집안에 커다란 약사불상, 갖가지 불교용품들을 늘어 놓고 경배하면서도 정작 신앙으로 삼지는 않은 점이 또 하나의 프랑스 불교인들이 불교를 받아들이는 형태다.
천주교와 비교하였을 때 불교의 어떤 점이 매력으로 느껴졌는지 물었다. 천주교의 성모님보다 불교의 자비심이 더욱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한다. 이것은 또 무슨 얘기일까? 그들의 삶에 보다 친근한 교리가 다가왔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달라이 라마의 책, 그들의 법문,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느껴지는 부처, 그런 것들이 그들을 감화시키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멀어지고 있는가?
그들에게 하나님은 부처보다 왜 멀게 느껴지고 있을까? 불법이 보여주는 '진리'에 조금이라도 맛을 본 것일까? 하나님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이제는 한계로 느껴진 것은 아닐까? 티벳불교가 프랑스에 들어간 지 어언 40년이 넘는다고 했을 때 그들에게 알맞는 방식으로 그들의 고민을 함께 해결해 줄수 있었다는 점이 그들을 불교에 귀의하게 했을 것이다.
티벳불교의 수행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미국인 교포로서 티벳 승려가 되신 용수스님의 안내로 찾아간 토굴은 철저히 혼자서 수행을 하는 한국불교의 간화선 같은 것이 아니었다. 혼자서 수행하는 장소는 있되, 스승이 한 달에 두어번씩 찾아와 공부를 점검하는 1:1 과정이 3년 3개월 3일동안이나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분들이 한 스승 밑에 1,000여 명이나 된다하니 그 위력이 바로 티벳불교가 프랑스에 자리잡게 한 조직력이라 할 수 있다.
| |
 |
|
| |
| ▲ 한국의 기독교 성국화사업등에 대해 국제사회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였음에도 활용하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쉬웠다. 왼쪽부터 묘운스님, 현장스님, 달라이 라마, 용수스님. |
| |
프랑스 불교의 특징은 티벳불교의 여러 종파가 있지만 이들끼리 분쟁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세력다툼을 하지 않고 불교의 포교활동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하지 않았어도 쉽게 수행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정 출가를 하여 더 공부를 하고 싶은 분들은 수계를 받겠지만, 대부분 일상생활을 하면서 수행까지 겸하는 재가불자들의 돈독한 신심이 티벳불교의 번창을 이루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불교와 비교해 보니
한국불교에서 신행활동을 하는 재가불자들은 대부분 기초교리과정을 마치고 나면 그리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다. 프랑스처럼 한 곳에 7,000명이 모여 5일 동안 하루종일 공부하는 모습을.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법회라 하면 108배 정진, 염불정진, 참선, 묵언 등의 내용으로 진행된다. 큰 법회에서 스님의 말씀을 듣는다하여도 신자들이 교재를 들고 앉아 몇 페이지 몇 구절 부처님 말씀에 대해 토론해 본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달랐다. 부처님 말씀 몇 구절이 무슨 말씀이냐며 자신들이 궁금한 것들을 질문을 통해 해결하고 또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 |
 |
|
| |
| ▲ 이른바 토굴이라 부르는 개인 수행처를 방문하였다. 3년 3개월 3일을 스승님의 일대일 지도 아래 공부한다고 한다. 우리도 이런 전통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
| |
우리나라 불교의 가장 큰 장점은 화두선이라 한다. 티벳불교에서 감히 따라 잡을 수 없는 고유하고도 면밀한 지름길, 간화선이 우리의 큰 보배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감히 이루어낼 사람들은 참 드물다. 근기가 높은 스님들 몇이나 가능하다. 대부분의 신도들은 그저 좌절하고 만다. 너무 어렵고 잘 모르겠고, 지도해 주시는 스승도 찾기 어렵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불교의 개선은 시급하다. 신도교육에 있어 기초교리는 물론이고 흔히 열리는 법회에 차근차근 경전을 하나씩 공부해 나가야 한다. 금강경, 열반경, 법화경의 내용이 무엇을 담고 있으며 그것은 어떻게 우리 삶에 나타나 있는지를 토론을 통해, 진지하게 공부하는 자세가 마련되어야 한다.
흔히 깨달으면 된다는 생각에 경전읽기는 소홀히 하고 참선 수행이나 염불 수행을 권장한다. 그러나 무엇을 알아야 깨닫든지 말든지 하지, 우리 불교의 현실은 현실 유지를 위한 보시금, 동참금, 각종 재를 통한 조상에 대한 기복이 강조되고 있다. 물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부처님의 가피력을 구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불교도로서 실천하고 참여하는 힘이 되는 불교의 사상에 대해 깊이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초파일에 등달기, 연등달기, 작은 부처님 모시기와 같은 불사에는 동참을 적극 권유하면서도 다음 번 절에 올 때까지 경전 몇 구절 어느 부분을 공부하고 오라는 말씀을 들어본 적은 거의 없다.
목표가 무엇인가
왜 절에 나가는가? 우리는 왜 석가모니 부처를 따르는가? 부처의 무엇을 닮고자 하는가? 종교편향 반대시위를 보면서 가슴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불법승 삼보를 우리가 얼마나 소중히 받들었는가 반성하게 된다. 그중에서 스님들이 우리 신도들에게 얼마나 큰 스승이 되고 있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포교하시는 스님들이 과연 얼마나 계율을 잘 지키고 계신가 생각해 볼일이다. 청정한 계율은 청정한 법신을 이루기 위함이자, 일반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다. 둘째, 교리와 법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기 쉽게 설파하고 계신가 생각해 보게 한다. 몇몇 유명하신 스님들을 제외하곤 불법에 대해 쉽고 재미있고 일상의 문제를 불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담긴 법문 내용을 듣기 어렵다. 한자말 그대로 게송을 읊으시면 우리 한글세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저 '먼산을 바라보게'된다. 셋째, 젊은이들에게 이해 가능한 책자, 동영상, 게임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불법을 전해야 한다. 젊은 사람들이 절에는 없다. 지방의 절에는 노보살들이다. 어린이도 찾기 어렵고, 더구나 젊은 대학생들을 절에서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
어떤 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다. '새벽예불과 여자 문제만 해결되면 잘 살 수 있을텐데'. 물론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승가의 전통이고 그 고통 속에서 깨달음의 길을 갈급하게 한 원천이 되는 것일진대, 부처님 말씀 속에 왜 그렇게 수행을 했어야 했는지 밝히고 있는데도 그것이 큰 문제라면 일본처럼 또는 태고종처럼 결혼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본질을 잊어 버릴만큼 불법을 전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새벽예불과 여자라면 그런 형식들은 과감히 벗어버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부처를 만나 것이 소중한 인연이라면
부처를 만난 것이 그렇게 소중한 인연이라면, 이 인연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 될 것이다. 부처, 그 말씀이 소중한 것이라면, 그 말씀을 언제나 들을 수 있도록 법석이 마련되어야 한다. 한국불교의 가장 큰 문제는 권위주의인 것 같았다. 프랑스에서는 권위와 형식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존경하는 마음은 불법을 열심히 공부하고 구현하는데 있을 것인바, 그것을 통하여 존경과 예경을 다하면 되지 않을까? 내용을 탐구하자. 그래야 프랑스인들과 함께 토론하고 불국토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아! 기독교인들이 불교탄압을 하는 가장 밑바닥에는 교육을 치밀하게 하지 못한 우리 어른들의 몫도 한 몫을 하고 있다는 질타를 스스로에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연하자면, 일본평화박물관 순례 시에 기독교단체와 여행을 했을 때, 그 치밀한 준비에 놀랐다. 관계자와의 면담, 인터넷으로 사전 일정과 계획 짜기, 사후 보고서와 토론회 개최하기까지 정말 빈틈없이 진행되는 것을 보았다.
이번 프랑스 여행은 그와 비교했을 때 정말 실망스럽다. 사전 일정을 알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관계자와의 면담도 계획에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의 작은 경험이지만 기독교단체와 불교단체와의 격차는 이렇듯 드러난다. 기독교단체의 치밀함을 우리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불교를 살리고 우리 인류에 평화를 가져오는 길이다.
초파일 행사에 전국의 모든 사찰에서 프랑스 신도들처럼 4박5일 일정의 토론회가 열릴 수 있는 힘을 갖춘다면 아무리 기독교가 맹위를 떨친다하여도 부처님의 그 위대한 말씀은 펄펄 살아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